전시

특별전

일본의 조선지도와 식민주의 - 박현수 / 영남대 교수 N

No.1214091
  • 작성자 허미영
  • 등록일 : 2012.07.25 16:36
  • 조회수 : 957

일본의 조선지도와 식민주의
 
박현수/영남대 교수
 
  
 조국 일본이 제국주의의 길로 치닫는 것을 보고 애태우던 시인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天琢木)는 1910년 가을, 이렇게 읊은 바 있다.
   지도 위 조선국에 검게검게 먹칠하며 추풍소리 듣는다.
   일반적으로 지도란 것은 실재하는 땅의 모습을 일정한 비율로 축소하여 한눈에 굽어볼 수 있게 하는 장치이다. 시간과 공간을 떠난 인간의 행동이 있을 수 없듯이 역사와 지도 없이 한 땅과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제의 침략사가 일제의 조선지도 제작에 반영되고, 일제의 조선 통치사(統治史)가 일제의 조선 역사·문화 연구에 비추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특히 지도 작성으로 나타나는 지리 조사는 식민지 획득과 그 통치를 위한 일반적이고 기초적인 조건이다.
   지도 위 조선국에 타쿠보쿠(琢木)가 먹칠할 때 침략을 위한 조선지도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으며, 남은 것은 통치와 수탈을 위한 지도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일단 식민지가 된 나라를 지도화하는 것에 비하여 무리하게 한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지도화하는 것은 이만저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식민지화의 과정 자체만큼이나 힘겨운 일이었다.
   일찍이 세계체제 속에서 동등한 지위를 차지하던 조선과 일본이 각각 제국과 식민지라는 대극적(對極的) 관계를 이루게하는 첫단추는 1876년에 조선의 개항이라는 형태로 채워졌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과 더불어 미숙한 자본주의국(資本主義國) 일본은 중간 단계를 생략한 채 제국으로의 길에 들어섰다. 메이지(明治) 직후 정한론(征韓論)의 소용돌이는 조선의 지도에 대한 각계의 수요를 일으켰다. 이에답한 것이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일본에 전해진 조선초기의 지도를 황급히 모사한 지도들이었다. 양성지(梁誠之)와 정척(鄭陟)의 지도에서 비롯하는 고지도를 이용하여 일본식의 극채색 목판화로 변용시킨 센자키(染崎延房)의 <조선국세견전도(朝鮮國細見全圖)>(1873)는 대표적인 작품이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조선국의 지도를 그리기에 앞서 일본은 다양한 학문적 뿌리를 바탕으로 나름대로의 지도그리기 전통을 이어왔다. 백제계(百濟系) 왕인(王仁)의 자손인 교오키(行基)는 최초의 일본지도를 남겨 교오키식 지도(行基圖)는 천 년 가까운 세월 동안 모사되었고, 이 지도를 바탕으로 신숙주(申叔舟)가 펴낸 일본지도는 최초의 인쇄본(印刷本) 일본지도로 기록되는 만큼, 조선을 떠나 일본지도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영접을 위한 교양을 위해 <삼한세표(三韓世表)>(1747) 같은 목판수진본(木版袖珍本)에 곁들여 많은 조선지도가 보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독자적 조선지도인 <참모국 조선전도(參謀局 朝鮮全圖)>(초판 1876년 간행)는 중세적인 그러한 전통에서 해방된 근대적 서양 기술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조선 전기의 조선지도가 임란에 이용되었듯이 육군참모국의 이 지도는 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운양호(雲揚號) 사건의 길잡이가 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육군참모국 또는 참모본부가 추진한 지도 제작 사업』그 자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방대하고 집요한 군사용 지리 정보 수집, 즉『병요지지(兵要地誌) 작성의 주춧돌이자 상부 구조물이었다. 조선의 자연과 문화에 대한 조사어서 앞장선 것은 군부였지만 이들 데이터는 언제나 비밀스러운 것이어서 일정한 기간이 흐른 뒤에야 학계나 민간에서 이용할 수 있었다.
   일정한 수준에서 군사자료를 이용하면서 조선에 대한 조사와 연구의 또다른 주체로서 떠오른 것이 협회라는 이름을 가진 각종 민간단체들이었다. 마케팅을 위한 상인들의 조사단체로서의 성격으로부터 학술단체적 성격까지 기능상의 프러즘을 보이는 이 단체들은 결국 종합적 지역연구단체(地域硏究團體)로 성장해 가는데, 조선지도들을 보급하는 데 가장 기여한 것은 이 단체들이었다. <동경지학협회 조선전도(東京地學協會 朝鮮全圖)>(1902)는 그 자체에서 참모본부의 지도를 참조했음을 밝히고 있으며, <흑룡회만한신도(黑龍會 滿韓新圖)>(1904) 역시 발행단체의 성격에 비추어 참모본부의 지도를 이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군부와 상인과 학계의 조사 연구가 단절되지 않고 유착되는 것이야말로 식민지를 비롯한 이웃 나라와 먼 나라에 접근하는 일본적 특징이었다. 거의 아시아대륙 전체를 대상으로한 군부의 지도 작성과 지지(地誌) 조사가 이른바 일본 동양학(東洋學)의 바탕이 된 것이다.
   청일전쟁(淸日戰爭) 시기에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던 지역조사 단체들은 노일전쟁(露日戰爭) 무렵부터 해체되기 시작한다. 대만은 식민지가 된 지 오래며, 남만주와 조선도 식민지 상태에 빠져 지도 제작과 사회·문화 조사는 통·당국이 '합법적(合法的)'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참모본부의 육지측량부(陸地測量部)는 이미 19세기가 끝날 무렵 1:5만 축척의 조선지도 도엽(圖葉)들을 거의 완성해 놓고 있었다. 침략을 위한 지도라고 보기 어려운 이러한 소축척(小縮尺)의 지도작성은 뒷날 총독부가 할 일을 군부가 미리 처리한 셈이다.
   수백 년에 걸쳐 한일 양국의 지도가들은 상대국의 지도를 상대국의 자료에 바탕하여 그려왔다. 그러나 양학(洋學)을 수용한 일본측이 새로운 기술로 독자적인 조선지도를 그리게 되면서 호혜적인 양국의 관계는 대극적인 관계로 전환되어 갔다. 일본은 종이 위에 한국을 그리고, 한국은 일본에 의해 그려지게 되었다.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天琢木)가 지도 위 조선국에 먹칠하던 때는 한국 사람들이 자기네 땅을 스스로 그리지 못하고 일제가 그려주는 지도에 의존하게 되는 때였다.